열린책 세계문학 앱이 젊은 층의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자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에서, 단테의 <신곡> 전자책에 행번호를 넣어달라는 요청을 보면서 평소 전자책과 관련하여 품고 있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출판사는 종이책을 만들 때 그 내용과 분량에 최적화된 디자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엄청난 수고와 비용을 투자하는 법인데 ...,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완성한 책의 편집과 디자인이 어째서 전자책에는 담기지 못하고 그냥 버려지는 것일까?
열린책들의 종이책 <신곡>도 세상에 나오기까지, 담당 에디터와 디자이너가 글꼴부터 표지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민을 거듭한 후에야 컴퓨터 파일이 최종 저장되고, 필름이든 CTP 방식으로든 종이에 인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첨단정보기술의 산물인 "전자책" 에서 [신곡]의 행번호 살리는 것조차 기술적으로(!) 어려운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기술적 내막을 잘 모르는 컴맹 소비자로서 추정컨대,
작은 용량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epub 같은 텍스트 위주의 포맷들이 전자책 시장의 대세로 자리 잡은 것이, 종이책에 담긴 소중한 북 디자인을 다 내버리게 된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epub 파일 등은 전자책이 아니라 *.txt 파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폰트, 자간, 줄간격, 쪽수, ... 등 모든 것이 너무 유동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다양한 크기의 단말기 화면에서 표시 가능하게 하려면 불가피한 선택일까요? 다양한 단말기에서 다양한 형태로 재편되어 표시되는 글은 그야말로 정보일 뿐, 책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게다가 요즘은 대형서점에서 제각각의 플랫폼과 기기를 통해 여러 출판사의 좋은 책들을 아주 허접한 전자책 판본으로 변형시켜 판매하고 있습니다. 책의 편집과 디자인은 출판사 고유의 몫이었는데, 요즘은 서점들이 출판사에서 받은 텍스트와 그림파일을 가지고 멋대로 신뢰할 수 없는 판본들을 양산하는 꼴입니다. 올*이북에서 시험 삼아 전자책 한 권을 사 보았는데, 이건 책이라고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돈 주고 샀다는 점 빼고는 해적판보다 나을 게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전자책이 (종이책 이상의 오탈자는 없다 하더라도,) 원본 종이책과 페이지 조판이 마구 달라지니 어디에 인용할 생각은 아예 접어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책의 편집+디자인은 서점이 아니라 출판사의 몫입니다.
* * *
전자책 출판의 틀이 다잡히지 않은 과도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컴맹 소비자인 제가 생각하는 과도기적 대안은 PDF 전자책입니다.
제가 PDF를 대안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시카고대학출판부의 <국부론> PDF 판을 손에 넣은 일이었습니다. (1,150쪽에 달하는 종이책 <국부론>은 휴대나 독서에 전혀 편리하지 못했습니다.) 장시간의 인터넷 검색 끝에 같은 책의 PDF 판본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파일을 열어보고 두 가지 점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1. 전자 폰트로 구성된 파일이 아니라, 종이책을 그대로 스캔한 영인본의 PDF라는 점
2. 일종의 영인본인데도 본문 검색과 복사가 가능하다는 점.
더 알아보면서, 이제는 이런 전자책을 개인도 손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또 놀랐습니다.
1. 스캐너 자동급지장치가 달린 레이저복합기를 20만원 이하로 구입한다.
2. 책등을 잘라내고 책의 모든 페이지를 자동급지장치로 스캔한다.
(시간이 없고 돈이 많은 사람은 스캔 대행 업체에 의뢰한다)
3. 홀수쪽과 짝수쪽 순서를 맞춘다. (Darknamer가 필요할 때도 있다)
4. ABBYY에서 OCR 작업을 명령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신다.
5. OCR이 완료된 그림파일들을 PDF로 저장한다. 끝.
이제는 그림파일로 된 본문 페이지에 OCR 정보를 담을 수 있게 됨으로써,
종이책을 사진처럼 재현하는 동시에 본문 검색이라는 전자책의 가장 중요한 장점도 구현하는 것입니다.
90년대 초반, 이어령씨까지 나서서 홍보하시던 국산 OCR 아르미 초기 버전과 ADF도 없는 스캐너로 뭔가 해보겠다고 궁싯거리다가, HDD 용량은 부족하고, 컴퓨터는 느리고, 기껏 OCR을 해도 유니코드가 없던 탓에 유럽언어들의 알파벳 부가기호는 다 깨지고..., "차라리 타이핑하는 게 더 빠르겠다'고 한탄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기술발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판사는 PDF 제작시 종이책을 스캔하는 방법도 가능하겠지만,
종이책 인쇄를 위해 제작한 최종 DTP 파일을 PDF로 직접 변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만든 <신곡> PDF 전자책은 종이책의 특성과 전자책의 장점을 모두 가질 것입니다.
ㅇ 행번호가 종이책 <신곡>의 조판과 똑같이 재현될 것입니다.
ㅇ 이 전자책에서는 본문 검색이 가능하니, 공부하는 사람에게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ㅇ 학자들도 이 전자책을 정본으로 참조/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 페이지의 첫글자와 끝글자가 종이책과 똑같고, 총쪽수도 똑같으니까요)
ㅇ 기존 DTP 파일을 PDF로 변환하는 데에 경비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도 출판사 입장에서 큰 메리트가 될 것입니다.
ㅇ 판매에 있어서도, 출판사가 만든 종이책의 내용과 형식을 그대로 담은 정본 전자책을 유통함으로써 엉터리 전자책들을 몰아내고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지, 책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하자면, 전자책 제작현장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1인의 소비자로서
1. 원본 종이책을 그대로 재현하는 (PDF) 전자책이 활발히 유통되기를 바랍니다.
2. 열린책들세계문학앱에서 전자책을 구입할 때도 아래와 같은 안내 문구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열린책들세계문학 구입 안내--------
EPUB 버전 또는 PDF 버전을 선택하십시오.
ㅇ epub(가변형): 다양한 크기의 단말기에서 사용자가 글꼴 등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ㅇ pdf (불변형): 종이책과 똑같은 형태를 유지합니다. 아이패드 미니보다 작은 단말기에서는 읽기에 불편할 수 있습니다.
(** 두 형식 모두 본문 검색 및 메모 등이 가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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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의 어느 독자 드림
PS: 위의 PDF 전자책 예찬은 제 생각일 뿐입니다. 현장에서 PDF가 EPUB 계열에 밀린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실무자 분께서 현장의 이야기를 시간 나실 때 조금씩 들려 주시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