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룬투는 결국 이렇게 멀어지고 말았지만 우리 후세는 아직도 함께 어울렸다.
(……) 나는 그 애들이 다시는 우리처럼 서로 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또 그들이 함께 어울리려고 나처럼 이리저리 떠도는 고달픈 생활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 그들이 룬투처럼 괴로움으로 정신이 마비되는 생활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 다른 사람들처럼 괴로움으로 방종한 생활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은 새로운 생활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생활을 가져야 한다!
희망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몰래 그를 비웃었다. 그가 줄곧 우상을 숭배하면서 한시도 잊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생각하는 희망 역시 나 스스로 만들어 낸 우상이 아닌가? 단지 그의 소망이 현실에 아주 가까운 것이라면, 나의 소망은 막연하고 아득하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사실 땅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 된 것이다.
-루쉰, 「고향」,『아Q정전』중에서
잃어가는 것에 대한 애달픈 마음- 루쉰의 「고향」(1921)
날카로운 수정과도 같은 총 15편의 이야기 가운데 유독 이 단편에 내 마음이 기울었다.
나의 가족이 아직 살고 있거나 혹은 어린 시절, 가족이 살았던 터, 그리고 잊지 못할 추억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 고향 친구 한 명쯤은 여전히 살고 있고, 그들과 나눴던 순수하고 소탈한 우정이 숨쉬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가 여기는 전형적인 고향이라는, 아련한 공간이다. 고향이 물에 잠기거나 지도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고향을 떠올리는 애틋함마저 지울 수는 없을 터. 고향은 언제나 현재보다는 과거에 귀속되어 있다. 아니 그 편이 어울린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지 모르겠다. 현재의 삶에, 사회에 큰 만족을 느끼지 않는다면 과거를 향한 그리움은 더 짙어지게 마련이다.
여기, 오랫동안 떠나있다가 완전히 고향을 떠나기 전 잠깐 귀향을 한 주인공이 있다.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는’ 고향을 바라보는 그에게 정감 어린 고향은 이미 떠나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고향 자체보다는 과거의 고향 속에 살았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기에 여전히 마음 한 켠에는 유년시절의 따뜻함과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남아 있다. 그 추억의 중심에는 어릴 적 특별한 친구였던 룬투가 있었다. 20년이 넘는 상이한 세월의 흔적 때문인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돈다. 옛 친구와의 재회는 친구에서 ‘나리’라는 호칭의 변화와 함께 이제는 서먹해진 사이로 남아버렸고, 고향에 대한 흐릿한 그리움마저 떨치고 싶어했다. 곧 떠날 몸이고, 다시는 찾지 않을 곳이기에 보고 싶어 하는 마음도 미련도 고향에 남겨둔 채 떠나고 싶었다. 너무도 다른 각자의 삶이 지향하는 희망이라는 불빛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모호한 생각으로 이어지지만 결국 누군가는,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만큼은 그 두 희망이 서로 떨어지거나 갈등을 빚지 않고 조화를 이루기를 소망한다. 과거와 현재가, 농촌과 도시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괴리감이 생겨나지 않기를…….
루쉰이 대단한 작가이고 사상가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글과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소중한 책읽기였습니다.
혹여 발전이 없다고 탄식하며 답답한 마음으로 고향을 바라보는 마음을 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나서야 사무치게 그리워하지 않으려면, 여전히 나를 반겨주고 보듬어줄 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사람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이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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