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고유의 <어리석음>에 미덕이라는 수식어를 선사한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
어리석음을 지혜에 섞으라.
때로 어리석음도 즐거운 일이다.
-본문 중 호라티우스의 시를 빌려
웃음이 깃든 풍자는 참 신기한 장치이다. 이 장치는 현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깨끗한 창으로 변모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그 창을 통해 더러움이 가득 묻은 세상을 확인하더라도 분노를 끌어내지는 않는다. 대신 위트 덕에 낄낄거릴 수 있는 은근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하며, 틈틈이 예리한 시선을 담아 커다란 깨달음을 독자에게 던진다. 정확히 500년 전에 탄생한 『우신예찬』은 ‘변하지 않는’인간 본성 덕에‘변할 수 없는’지금을 어느 때고 볼 수 있는 맑은 창의 역할을 여전히 탁월하게 수행하고 있다. 역시 古典은 먼지가 내려앉더라도 미끄러져 버리는 표면인 것일까. 혹은 우리네 일상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숨쉬고 있으니 그 들썩임 때문에 녹이 슬 틈 조차 불허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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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1백 개의 혀와 1백 개의 입이 있고
무쇠의 목소리가 있다 한들, 모든 형태의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의 모든 이름을 열거할 수 없을 것이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 『우신예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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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것에 대한 진지한 일장연설보다는 짧은 우화가 훨씬 효과적인 깨달음을 끌어내듯이 작가가 『우신예찬』을 집필한 의도의 핵심은 비난이 아니라 웃음이다. 신랄하게 희화된 여러 인간상을 확인하면서 문득 생각이 작가에게로 흘렀다. 종교개혁으로 어지러운 시대의 파도 속에서 작가는 루터의 사상을 지지하며 그를 위한 진정서를 가톨릭 세력에 보내기도 하였지만 루터파의 격렬하고 어지러운 언행에는 수긍할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가 쓴 글을 보면 그가 누구보다도 뚜렷하고 강한 현실비판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그 의식은 관용으로 서로 타협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결국에는 보수와 급진파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맹목적으로 한 가지 목소리에 치우쳐 이성과 판단력을 흐리지 않고, 자신의 양심과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 홀바인이 담아낸 에라스무스의 초상을 다시금 보니‘정치와는 어울리지 않은 아름다운 영혼(Respublica nihil ad Musicum)’이 느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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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롱한 것은 다만 널리 확산되어 있으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인간성의 상실이었습니다.
-『우신예찬 』중 서한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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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의 연설을 다 듣고 나면 이어서 작가가 몇 사람에게 써 보낸 편지 글 몇 편을 읽게 된다.
자신의 글을 맹비난한 사람들에게 조목조목 반박하고,
이 책을 집필한 본래 의도를 상세하게 밝혀 자신의 글을 옹호하는 면모를 더불어 확인할 수가 있다.
‘우신의 가면’을 쓴 박식한 학자가 들려주는 이 풍자문에 귀 기울여 보는 것,
요즘처럼 맑고 시원한 기운이 도는 가을날을 알차게 보내는 하나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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