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 뿌쉬낀,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산문 예술의 정점.
근대 러시아어의 규범을 확립하는 동시에 완성하고, 근대 러시아문학의 기틀을 확립한 알렉산드르 뿌쉬킨의 역작이다. 이 작품은 극심한 농노혁명을 겪었던 혼란한 18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그 속에서 자신의 명예를 끝까지 지키고자 애썼던 한 평범한 귀족 청년의 사랑 이야기를 골자로 하는 역사소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소설의 진중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종일관 동화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에 우스꽝스러운 인물과 상황의 묘사를 사용하여 당시 주류를 이루던 역사소설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뿌쉬킨은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전 유럽을 휩쓸었던 역사관, 즉 역사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지만 예술가는 그 이면에 담긴 진실을 발견하며, 평범한 인간의 사소한 일상이 국가의 공식 역사보다 더 값진 역사를 간직한다는 역사관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 속에는 “평범한 인물들에게서 발견되는 단순한 위대함”이 소설의 주제론적 차원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뿌쉬킨의 작품의식은 후대 톨스토이, 숄로호프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역사라는 가면 대신 개개인의 진실한 삶의 모습과 진정한 휴머니즘의 정신을 소개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역사적 진실과 리얼리티가 문학적으로 여과된 장편 소설
역사적인 사건이 배경이지만 민중의 소박한 일상과 목가적인 자연, 주인공들의 순박한 사랑이 가볍고 유쾌한 어조로 서술되어 있다. <고전이 가장 현대적이다>라는 말을 확인시키듯 현대적인 어법과 문체를 구사하며 주제면에서도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인류 보편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진실된 역사 읽기>와 <재미있는 소설 쓰기>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뿌쉬낀의 최초이자 마지막 장편 소설.

줄거리
청년 장교 그리뇨프는 부임지 벨로고르스기 요새로 가는 도중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는다. 이때 어느 농부가 나타나 길을 안내해 준다. 그리뇨프는 하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농부에게 사례로 토끼털 외투를 선사한다. 뒷날 반란군의 습격에 요새가 함락되고 처형되기를 기다리던 그리뇨프 앞에 이 농부가 나타나는데....

뿌쉬낀은 <예언적인> 현상이다. 그의 등장에는 우리 러시아인 모두에게 지극히 예언적인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
-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뿌쉬낀은 우리보다 2백 년을 앞서간 작가이다. - 니꼴라이 고골

뿌쉬낀의 소설 속에서는 러시아의 삶이 당대의 모든 스타일과 언어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 미하일 바흐찐

뿌쉬낀은 시간도 공간도 모두 정복했다. - 안나 아흐마또바

지은이 알렉산드르 뿌쉬낀
러시아인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모든 것>이라고 부르는 뿌쉬낀. 다른 문학사의 거인들에게는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 뿌쉬낀에게는 허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뿌쉬낀은 한 나라의 근대 문학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뿌쉬낀은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면서, 동시에 오늘날에도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다. 뿌쉬낀은 가장 러시아적인 시인이지만, 그의 작품의 면면은 극히 서구적이다. 뿌쉬낀의 글은 러시아 구전 문학의 소박함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쉽게 쓰였지만, 그의 작품은 동시대 세계문학의 모든 사조를 꿰뚫어본 자가 시도하는 미묘한 게임이기도 하다. 그는 가장 고전적이지만, 가장 현대적(21세기 기준으로)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뿌쉬낀이 <재평가>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러시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작가라는 지위를 살아 있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단 한순간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의 <새로움>에 대한 발견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뿌쉬낀은 30대에 접어들면서 시보다는 점점 산문에 정열을 쏟기 시작했는데, 그가 죽기 1년 전인 1836년에 완성된 장편소설 『대위의 딸』은 그의 산문 예술의 완성이라 하겠다. 뿌가초프 반란을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역사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전편을 흐르는 가볍고 희극적인 어조이다. <대위의 딸>이라는 제목 자체가 뿌쉬낀의 태도를 잘 보여 주는데 여기서 그는 역사의 대사건을 가정 소설과 연애 소설로 바꾸어 조망하고 있다. 주인공과 약혼녀(대위의 딸) 집안의 평범한 삶, 주인공과 뿌가초프의 우연한 만남과 작은 선의의 교환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며, 피비린내 나는 반란과 그 진압은 외부적인 에피소드로서 오히려 사소하게 처리되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를 보여 준다. 하나는 뿌쉬낀이 역사와 개인의 운명을 혼동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러시아 전제 군주에게 반란자보다 우월한 역사적 지위를 부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뿌쉬낀의 냉정한 시각이다.

옮긴이 석영중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엿다. 1987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슬라브어문과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에 『러시아 시의 리듬』(1992), 『러시아 현대시학』(1996), 논문 「만젤쉬땀의 시인과 독자」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나는 사랑한다』, 『좋아!』(1993, 마야꼬프스끼),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1988, 스뜨루가츠끼 형제), 『알렉산드르 뿌쉬끼 문학작품집』(1999) 등이 있다. 뿌쉬낀 작품집 번역에 대한 공로로 1999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뿌쉬낀 메달을, 2000년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