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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텬로 력뎡, 2010년 천로 역정
원제는 The Pilgrim's Progress이다. 그대로 옮긴다면 <순례자의 여정>이다. 그런데 1895년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이 <텬로 력뎡>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한 후, <천로 역정>이라는 제목은, 원제 대신 모든 사전의 표제어로 오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1865년에 나온 중국어판의 제목도 우리와 같다.
1895년판은 풍속 화가로 유명한 김준근이 마흔두 장의 판화를 그려 목판 인쇄로 출판되었는데, 한국 출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또 얼마 전까지는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서양의 소설이, 그것도 서양 언어에서 직접 한국어로 옮겨진 것은 이 『텬로력뎡』이 최초라고 알려져 있었다. 여기에는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반영하여 갓을 쓰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 책은 『천로 역정』 1부만 담고 있다.
침례교 설교자인 존 버니언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계속 설교를 다녀 3개월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다시는 설교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또 체포되었는데, 그 바람에 12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버니언은 감옥에서 『천로 역정』(1678년)을 썼고, 이 책은 1685년까지 10판이 출판되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큰 인기에 힘입어 같은 제목의 위작이 쏟아져 나오자 그가 6년 만에 2부를 집필했다고 한다(1684년).
처음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영인본을 손에 쥐었을 때는 김준근 화백의 삽화를 본문에 넣을까 했었다. 삽화가 재미있기도 하고, 초판의 느낌을 살리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테니까. 그런데 42장의 삽화는 1부에만 국한되어 있고, 표지로 쓴 샤갈의 그림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현대적인 느낌으로 가기로 하고.
정말 많은 책이 나와 있다. 영문학자와 목사님들이 번역하신 책들이 꽤 많다. 심지어 중국어판을 옮겨 온 책도 있었다. 열린책들판은 어떤 점이 다른 걸까? 어떤 점이 달라야 할까?
편집자가 본 이 책의 체제는 조금 독특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대화체로 쓰였고,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의 대사처럼 운문의 느낌도 강하며, 또 자칫 잘못하면 지나쳐 버리기 일쑤인 이런 운문에서, 일단락되는 사건을 압축하기도 하고, 어떤 암시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믿음, 희망, 온순, 성실, 무지, 변절, 낙심, 질겁 등의 추상적인 개념들을 의인화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우습게도 이들은 각자 자기 이름값은 톡톡히 하는데, <순례자의 여정>에 일조하며 읽는 내내 찔리게도 하고 웃음도 준다. 성서와 마찬가지로 비유도 많이 등장한다. 심지어 버니언은 책 표지에 「호세아」를 인용하며 <비유를 택했다>고 쓰기까지 했다.
문제는 판본이다. 다섯 개의 원서 판본 중에서 시가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는 Everyman's Labrary 판을 골랐다. 그리고 장장 다섯 달에 걸쳐 원문 확인 작업을 했다(왜냐면 체제가 복잡하니까). 한참 책을 마무리할 즈음, 영문과 교수님 한분이 말씀하셨다. F. R. 리비스라는 평론가가 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존 버니언의 『천로 역정』은 셰익스피어 이후, 셰익스피어의 영어가 살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했단다.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이 책을 사전식으로 정의하면 <종교적 우화 소설>이다. 편집자인 내게는, 그저 문장이 까다롭고, 게다가 비유도 많고, 직간접적인 성경 인용도 많아 일일이 확인하느라 고생스러웠던 책일 뿐일까. 아니, 그렇지만은 않았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혼자 성경과 종교 서적을 읽으며,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는 이 책을 쓴 존 버니언. 그리고 가끔은 절망하고, 옆길로 새더라도 마침내는 다시 대로로 돌아와 하늘의 도시 앞에 있는 강에 이르는 순례자들. 어쩌면 작가 자신의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유난히 덥고 길었던 지난여름 내내 나는 무던히도 많이 위로받았다. 비록 종교는 다를지라도, 내 삶의 여정은 어떠해야 할까. 부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서가에서 뿌쉬낀을 시집을 꺼내어, 결국 찾아냈다! 1835년에 푸쉬킨이 『천로 역정』을 바탕으로 쓴 시다.
순례자
1
언젠가 황량한 골짜기 헤매다
불현듯 깊은 슬픔에 사로잡힌 나
무거운 짐에 눌리고 시달려
법정에서 살인죄 드러난 죄인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안타까이 두 손을 비비며
통곡 속에 고뇌로 찬 영혼을 호소하였다.
병자처럼 몸부림치며 거듭 애절하게 중얼거렸다
<무엇을 해야 하나? 앞으로 난 어떻게 되려나?>
2
이렇게 나는 비탄에 잠겨 집으로 돌아왔지만
나의 시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침묵한 나
우울한 생각 그들에게 감추고 싶었다.
그러나 슬픔은 시시각각 나를 더욱 조여 와
마침내 할 수 없이 속을 털어놓았다.
<아, 우리에게 슬픔이 닥쳤다! 자식들아, 아내여!
내 영혼 우수와 공포로 가득 찼고
괴로운 짐이 나를 짓누른다.
저기 온다! 벌써 때가 가까워졌다.
이제 강풍이 불고 불길이 솟아
우리의 도시 순식간에 잿더미로 화해
당장에 피난처를 찾지 못하면 우린 모두 파멸할 터
하지만 피난처는 어디 있나? 슬프구나!>
3
식구들은 당혹해하며
내 머리가 이상해졌다 생각했고
편안한 밤과 숙면이
내 지독한 열병을 치유하리라 여겼다.
나는 자리에 누웠지만 밤새 울고 한숨 쉬어
한 순간도 무거운 눈 붙이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홀로 앉은 나
그들이 찾아왔지만
전과 똑같은 대답만을 되뇌었을 뿐.
내 말 못 미더운 친지들
엄하게 다루는 게 상책이라 생각해
냉대와 경멸과 욕설로 날 고쳐 주려 했지만
나는 그네들 말 무시한 채
마냥 비탄에 잠겨 울고 한숨지었다.
그들도 마침내 소리치다 지쳐
손을 내저으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
장광설과 비명에 염증이 나서
엄한 의사에게 미친놈 맡기고 떠나듯이.
4
슬픔에 겨워 다시 방랑길에 오른 나
두려움에 찬 눈길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감옥에서 도망쳐 나온 죄수처럼
비에 젖어 묵을 곳 찾는 나그네처럼.
나는 영혼의 노동자, 자기의 쇠사슬 끌고 가다
책을 읽는 한 젊은이 만났다.
그는 그윽한 눈길 들어 내게 물었다
어찌하여 홀로 헤매며 그토록 슬피 우는가?
그래서 나는 답했다. <내 사악한 운명을 살펴 주오.
나 죽을 운명의 인간, 죽어서도 심판받을 몸
하나, 심판의 각오 안 되어 지금 이리도 슬픈 거요.
죽음이 무섭기만 하오.>
<당신의 운명 그러하다면
당신이 정말로 그토록 가엾은 처지라면
무얼 기다리고 있소? 어째서 도망치지 않는 거요?>
내가 되물었다. <어디로 간단 말이오? 어느 길로?>
젊은이는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해 보시오, 무언가 보이지 않소?>
방금 의사가 백내장을 고쳐 준 소경처럼
나는 괴로움에 눈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나는 드디어 말했다. <무슨 빛이 보이는구려.>
젊은이가 계속했다. <빛을 따라가시오
저 빛이 당신의 유일한 목표가 되도록
구원의 좁은 문에 다다를 때까지 걸어가시오!>
하여 나는 즉시 달리기 시작했다.
5
나 달리는 모습 본 식구들 심히 걱정하여
아내도 자식들도 문지방에서
얼른 돌아오라 소리쳤고
그들의 고함 소리에 내 친구들 광장에 모여들었다.
나를 욕하는 이, 아내에게 충고해 주는 이
친구를 불쌍히 여기는 이
비방하는 이, 비웃는 이
이웃에게 나를 강제로 끌어 오라 말하는 이
벌써 날 잡으러 쫓아오는 이.
그럴수록 나는 더 빨리 길을 질러 달려갔다
이곳을 떠나 한시 바삐
구원의 참된 길과 좁은 문을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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